
중국 웹툰 원작 애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기대치를 낮추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화를 틀자마자 설정이 생각보다 흥미롭다는 걸 느꼈습니다. 불면증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탄생한 새로운 종족, 그들을 가두는 특수 교도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생존 게임. 이 글에서는 블러디 보레스가 흡혈귀물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비틀었는지, 서바이벌 구조가 서사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이 작품이 어떤 시청자에게 맞고 맞지 않는지를 직접 본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합니다.
- 방영일: 2016년 10월 ~ 2016년 12월
- 제작사: Creators in Pack / Namu Animation
- 원작: 백효 (중국 웹툰 불면불휴)
- 평점: MyAnimeList 1.0 / 5.0
블러디 보레스 — 흡혈귀물이 아닌 사회 통제극으로 읽는 법
이 작품을 단순한 뱀파이어 배틀물로 접근하면 기대와 다르다는 느낌을 받기 쉽습니다. 블러디 보레스의 출발점은 흡혈귀 신화가 아니라 근미래 사회 설정입니다. 전 세계를 강타한 불면증 유행과 그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탄생한 흡혈종, 즉 블러디 보레스는 기존 뱀파이어와 달리 인간 사회 안에 공존하면서도 격리 대상이 되는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작품의 핵심 장치인 디스토피아(Dystopia) 설정이 등장합니다. 디스토피아란 사회 구성원이 국가나 집단의 강압적인 통제 아래 자유를 박탈당한 세계를 묘사하는 서사 장르 개념입니다. 블러디 보레스는 흡혈종의 목에 BST 단말기라는 통제 장치를 심어두고, 지정 구역을 이탈하거나 명령을 어기면 즉각 처형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사회 구조를 그립니다. 제가 1화를 보면서 가장 강하게 반응했던 부분이 바로 이 장면이었습니다. 목에 달린 장치 하나로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구조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어떤 감각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인공 미 류는 인간과 흡혈종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평화의 상징으로 불리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대규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특수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교도소가 단순한 수감 시설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괴물이 출몰하는 폐쇄 공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장르가 서바이벌로 전환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진흥기구(VIPO)의 분석에 따르면, 2010년대 중반 이후 중일 합작 애니메이션이 꾸준히 증가했으며 원작 웹툰의 서사 구조를 유지하면서 일본 연출 방식을 접목한 작품들이 독자적인 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출처: VIPO). 블러디 보레스도 그 흐름 위에 있는 작품입니다.
서바이벌 구조와 혈능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교도소 안에서 전개되는 서사는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 구조를 따릅니다. 클로즈드 서클이란 등장인물들이 외부와 단절된 밀폐 공간 안에 갇혀 탈출이나 생존을 도모하는 서사 장치로, 공포나 미스터리 장르에서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주 쓰이는 방식입니다. 출구를 알 수 없는 공간, 믿을 수 없는 동료, 정체 모를 위협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맞물리면서 작품의 중반부까지 꽤 촘촘한 긴장감이 이어집니다.
작품의 또 다른 축은 혈능(血能) 시스템입니다. 혈능이란 흡혈종이 자신의 피를 매개로 발동하는 고유 초능력을 말하며, 캐릭터마다 다른 형태의 능력이 발현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이 혈능이 단순한 전투 수단이 아니라 각 캐릭터의 심리 상태와 연결되는 방식으로 연출된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미 류의 능력이 각성하는 장면은 그가 처한 상황의 절박함과 맞물려 감정적으로 꽤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중반부 이후 전개가 급격히 흐트러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설정은 탄탄하게 깔아놨는데, 그 설정을 소화할 분량이 부족했습니다. 12화라는 짧은 편수 안에 세계관 설명, 교도소 미스터리, 혈능 각성, 음모론까지 한꺼번에 밀어 넣으려다 보니 전개가 압축되는 인상이었습니다. MAL 평점이 4.7이라는 낮은 수치를 기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애니메이션 산업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단편 분량으로 제작된 중일 합작 애니메이션의 경우 원작 서사를 충분히 소화하지 못해 완성도 측면에서 낮은 평가를 받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블러디 보레스도 이 패턴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 작품이 맞는 사람, 맞지 않는 사람
블러디 보레스는 설정과 실제 완성도 사이에 온도 차가 있는 작품입니다. 디스토피아적 사회 통제, 폐쇄 공간 서바이벌, 혈능 각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조합된 방식 자체는 분명 신선합니다. 저는 1화에서 3화까지는 이 작품이 꽤 숨겨진 수작일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스스로 설정해 놓은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하는 장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복선을 충분히 회수하지 못한 채 결말로 향하는 전개는 분명 아쉬운 지점입니다. 완결된 서사보다는 원작으로 이어지는 맛보기에 가까운 구성이라고 보는 게 솔직한 평가입니다.
흡혈귀물이나 서바이벌 장르를 즐기는 분들에게는 1화부터 3화까지만 보고 취향을 판단하시기를 권합니다. 설정의 신선함이 마음에 든다면 끝까지 볼 수 있고, 전개가 답답하다면 그 시점에서 정리하셔도 충분합니다. 중일 합작이라는 독특한 제작 방식에서 나오는 이질적인 분위기 자체가 매력이라고 느끼는 분들이라면 생각보다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비슷하게 폐쇄 공간 서바이벌과 능력자 배틀을 결합한 작품으로는 갓이터 리뷰를 다음 글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다크한 분위기의 액션 애니를 찾고 계신 분들이라면 함께 참고해보시길 권합니다.